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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상의 정치학②] 한달만에 끝났을 우크라 전쟁, 평화 파괴자는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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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28일 미카일로 포돌리악 우크라이나 대통령 자문역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대표단과 러시아 대표단은 벨라루스 접경의 우크라이나 프리피아트 강 인근에서 첫 대면 회동을 했다. 이 때부터 3월 30일까지 7차례 온·오프라인에서 1단계 협상을 가졌다.

'인도주의 회랑' 개설 성과

러시아 측은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및 루한스크·도네츠크의 독립,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포기, 탈군사화(중립국화), 탈나치화(정권교체)를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15개 평화안에 러시아군의 전쟁 전 위치로의 퇴각, 재침공의 경우 국제적인 군사지원 보장이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 3일 회담에선 민간인 피난을 위한 '인도주의 회랑'을 개설키로 합의하는 성과가 있었다.  

3월 5일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제안으로 나프탈리 베네트 전 이스라엘 총리가 첫 '피스 메이커(Peacemaker)'로 등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대면 회동했고 미국과 프랑스와도 조율했다. 베네트 전 총리는 올해 2월 6일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전쟁은 개전 한 달쯤 지나 끝날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을 결정한 나토가 협상을 깼다고 폭로했다. 베네트에 따르면 타결이 임박했던 것은 러·우 모두 중요한 양보를 했기에 가능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탈군사화·탈나치화 요구를 철회하고, 젤렌스키는 나토 가입을 포기했다. 베네트는 "양측 모두 종전을 원한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타협 가능성이 50 대 50 정도였다"면서 마라톤 협상을 통해 17개 항의 합의문 초안도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들(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국가들)이 타결을 막았다"고 폭로했다.

튀르키예의 중재도 있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 장관과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 장관은 3월 10일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외교 장관의 주선하에 튀르키예 안타야에서 대면회담을 시작했다. 차우쇼을루 장관은 같은 달 20일 "평화협상이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는 이스탄불에서 29일 열리는 평화회담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나토 가입 포기가 논의될 것이라고 러시아 독립언론과의 28일 화상 인터뷰에서 말했다.(가디언) 3월 말이면 키이우를 포위했던 러시아군이 퇴각하기 시작한 무렵이다.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넵스키 거리의 전광판에 군대 입대를 권하는 선전물이 방영되고 있다. 2023.4.6.  로이터 연합뉴스

첫 피스메이커는 베네트

파이낸셜타임스도 3월 17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 및 외국군대·무기 배치 금지, 러시아군의 즉각 철수 등 15개 항의 초안이 마련됐다고 전했다. 

나토 회원국들의 제동은 이즈음 집중됐다. 29일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외교 장관은 미국 PBS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를 언급하며 "푸틴과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끝이 아닐 것"이라며 러시아의 약속을 믿지 말 것을 당부했다. 르 드리앙 프랑스 외교장관도 같은 날 "러시아는 타협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RFI)

러시아군이 퇴각한 뒤 키이우 외곽의 부차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 시신 사진이 언론에 배포된 것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각국 언론이 '부차 학살'을 규탄하면서 평화협상 분위기는 식었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민간인 학살 의혹이 중요한 국면에 터져 나온 것은 낯선 장면이 아니다.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사태 당시에도 세르비아 측의 전쟁범죄 의혹이 사진과 함께 터져나왔지만 모두 규명된 건 아니다.)

이후 상황은 "푸틴-젤렌스키 회담(추진)이 존슨의 (키이우) 방문 뒤 중단됐다"는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매체 우크라인시카 프라우다(Ukrainska Pravda)의 5월 5일 보도가 설명해준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4월 9일 키이우를 방문, 젤렌스키에게 "서방은 푸틴과 체결한 어떠한 평화안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무력이 예상보다 약하다는 점을 들어 젤렌스키에게 군사적 승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베네트의 증언과 일치한다. 존슨 총리가 우크라이나를 떠난 사흘 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의 회담이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코스티안티니프카의 주택 앞에서 지난 6일 물품을 나르는 주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2023.4.6.  AP 연합뉴스

첫 피스 브레이커는 미국과 서방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협상이 이어졌지만 겉돌았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 지원 무기를 방어용에서 공격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4월 25일 폴란드에서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 침공과 같은 일을 더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해 전쟁의 목적이 러시아의 군사적 약화임을 고백했다. 오스틴 장관은 5월 15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의 개전 뒤 첫 통화에서 러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촉구했다.  미국과 나토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협상의 시기와 조건은 우크라이나가 결정할 문제"라는 공식입장을 강조한다. 하지만 시기와 조건의 틀을 먼저 정해놓은 장본인이 그들이었다. 

9월 초 드미트리 코자크 러시아 대통령실장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불가입 선언과 러시아군의 전쟁 전 위치로 철수를 맞바꾸는 타협안을 도출했지만 이번엔 푸틴이 피스 브레이커 역할을 했다(로이터 통신). 점령지를 러시아 영토로 귀속시키는 것으로 목표를 높임에 따라 좌절시킨 것이다(9월 14일 로이터). 푸틴은 같은 달 30일 비공개 주민투표를 통해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하르키우 등 우크라이나 4개 주 점령지를 러시아에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젤렌스키는 같은 날 가디언 인터뷰에서 나토 가입 의지를 밝히면서 "푸틴이 대통령인 한 러시아와 평화회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협상 일지를 돌아보면 전쟁은 베네트 전 이스라엘 총리의 말대로 3월 29~30일 이스탄불 평화협상에서 종식될 수 있었다. 이후 러·우 양측은 각각 갈수록 비현실적인 조건을 내걸어 평화적 종전 가능성을 낮췄다. 

에르도안의 흑해 곡물수송만 성공

러시아가 점령지 병합선언을 하기 전 멕시코의 중재안이 관심을 끌었었다. 러시아와 우크리아나 외교 장관을 잇달아 접촉한 마르첼로 에브라드 멕시코 외교 장관은 9월 23일 유엔 총회에 '중재 위원회' 설립을 골자로 한 평화안을 제출했다. 중재위가 협상에 나서 최소 5년 간 휴전을 제안하자는 구상이었지만 불발됐다. 

군인복장을 한 우크라이나 경찰관이 지난 17일 아브디브카의 아파트 부근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에 대피할 곳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2023.3.17. AP 연합뉴스

몇 번의 중재 노력이 물거품이 되면서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퇴각과 우크라이나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9월 말 이후 러시아군이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하르키우 주 일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선이 고착됐다. 젤렌스키는 11월 15~16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 지도자들에게 화상 연설을 하면서 '10가지 평화 원칙'을 발표했다. 유엔 헌장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영토통합과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 전쟁피해 배상 및 전범 처벌 등이 포함됐다. 

미국이 외교적 해결에 손을 놓는 사이에 국제사회에 피스메이커로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쟁 탓에 곡물 수출이 막히면서 특히 개도국이 식량위기를 겪자 중재에 나서 지난해 7월부터 흑해를 통한 곡물 수송로를 확보했다. 러시아는 11월 세바스토폴항의 해군기지가 드론 공격을 받자 며칠 동안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를 중단했지만 곧 다시 참여, 지난 2월까지 715번의 항해로 2000만 톤의 곡물과 식료품을 운송했다.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는 지난 3월 다시 60일 재연장됐다. 

전쟁의 종식은 피스메이커와 피스 브레이커 간의 샅바싸움이기도 하다. 전쟁 당사국의 양보와 제3국의 방해가 없어야만 구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격전지 바흐무트의 어린이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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