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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기 시작했다... 펜데믹 이후 미-중관계

세계 읽기

by gino's 2020. 3. 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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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天子)의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된다.” 구정은 천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아홉개의 솥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왕은 주나라 사신과 자신의 군대를 둘러보던 중 주나라 황궁에 있는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넌지시 물었다. 주나라 사신은 “비록 주나라의 덕이 쇠했지만, 아직 천명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정의 무게를 묻기에는 이르다고 사료됩니다”라며 점잖게 꾸짖었다. 초나라 왕이 주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얼떨결에 구정을 탐하는 본심을 내보인 것이다.

천자의 구정을 둘러싼 고사는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 상대가 당신을 적으로 생각하도록 빈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천자의 권력을 국제정치학으로 풀이하면 패권국(hegemon)이 된다. 강력한 힘을 가질 때까지 야망을 철저하게 숨김으로써 패권국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6일 베이징에서 코로나19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주요 20개국(G20) 특별 화상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각국 정상들은 세계경제에 미치는 펜데믹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5조달러를 투입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EPA연합뉴스

 

마이클 필스버리 미국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략연구센터장(75)이 저서 <백년의 마라톤>에서 미국을 상대하는 중국의 전략을 설명하며 든 일화다. 흔히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외교전략으로 장점을 감추고 스스로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뜻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꼽는다면, 필스버리는 멀리 전국시대에서 사고의 뿌리를 찾는다. 기만술과 이간책, 세(勢)의 중요성 등의 개념으로 중국의 의도를 분석하고 미국의 대응 전략을 논한다. 구정의 고사를 뒤집어보면, 도전자가 내놓고 구정을 논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때가 됐다고 판단하는 증좌일 터.

코로나19(COVID19)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명확한 그림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그 중심에 미·중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필스버리가 떠오른 것은 바이러스 확산의 원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중 간의 ‘공식 논란’ 때문이다. 외교적 관례나 비난의 도를 넘어선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불거진 음모론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중국 원죄론. 바이러스 발원지로 추정되는 우한 화난시장에서 불과 15㎞ 떨어진 중국 국립과학원 바이러스학연구소에서 생물무기가 실수로 유출됐다는 주장이다. 미국 원죄론은 이달 초까지만 해도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만 오가던 주장이다. 지난해 10월18일부터 27일까지 우한에서 열렸던 제7회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가한 미군이 화난 수산시장에 의도적으로 바이러스를 유포했다는 주장이다.

중국 정부가 우한을 제외한 후베이성 봉쇄를 두 달만에 해제한 지난 25일 중국 베이징 역 앞에서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AP연합뉴스

생물무기 관련 음모론은 2002~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도 나왔다. 사스 바이러스가 홍역과 이하선염의 혼합물로 실험실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러시아에서 나오자 중국 SNS에서는 사스가 미국의 생물무기라는 주장이 퍼졌다. 글로벌 사건 뒤에는 늘 음모론이 나온다. 문제는 양국 지도부까지 논쟁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미·중관계는 물론 국제정치의 지형이 바뀔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미국 정치인 중 중국 원죄론을 포착해 확성기에 대고 수차례 떠든 사람은 톰 코튼 상원의원(공화·아칸소)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COVID19’가 아닌, ‘중국 바이러스’ 또는 ‘우한 바이러스’라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9일 언론브리핑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우한 바이러스’ 지칭을 “비열한 행위”라면서 비난했다. 12일엔 자오리젠 외교부 대변인이 SNS 계정에 “코로나19를 우한에 가져온 것은 미군일지도 모른다”며 음모론에 가담했다. 미국 국무부가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하자, 중국 외교부는 미국 고위관료 및 정치인의 중국 음해에 관한 맞교섭 제안으로 대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원죄론과 관련한 언론 질의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에서 온 것”이라고 못 박으며 중국 책임론을 강조했다. 폼페이오 장관도 중국이 초기 두 달 동안 정보공개와 방역에 실패했음을 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이 폼페이오와의 통화에서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동은 중국의 강한 반격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한 까닭이다. “바이러스19의 근원과 전파 경로를 연구해야 한다”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지시는 바이러스 진원지가 중국이 아님을 규명하라는 말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 당국의 봉쇄령이 해제된 후베이성 시아닝에서 지난 26일 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주민들이 거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중 지도부의 설전은 국내정치적 수요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미국 저소득층의 생활고가 온통 값싼 중국산 제품 탓이라는 ‘중국 때리기’로 득세한 트럼프다.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형태의 중국 때리기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쌓아가고 있다. 최근 ABC방송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책에 관한 지지율이 55%에 달한 게 이를 말해준다. 트럼프의 지난 대선 득표율(46.09%)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로 상당수 민주당 지지자들을 포함한다. 올해는 중국이 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한다는 ‘전면적 샤오캉(小康)사회’ 건설 목표연도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가장 심각한 사회정치적 위기’(포린어페어스)를 맞아 대미 태세를 공세적으로 전환함으로써 민심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을 법하다.

그 저변에는 이념 갈등이 깔려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 국내에 퍼진 에이즈 바이러스를 사회주의 체제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전쟁 동기로 활용해왔다. 중국은 1984년 4월 WHO 대표에게 제출한 에이즈 보고서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면서 에이즈 통제를 자신했다. 혈액 감염 사태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거듭된 실책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링성리 중국 외교학원 국제관계연구소 부소장 역시 코로나19와 관련한 미·중 상호 비방전을 ‘이념 경쟁’으로 규정했다. 

링 부소장은 19일 글로벌타임스 기고문에서 “중국은 과거 미국의 이념적 때리기에 소극적으로 대해왔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미국의 강화된 공세에 ‘덜 방어적’이 됐다”고 지적했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중국이 공세적으로 전환하면서 미국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한 에어컨 제조 공장에서 지난 25일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두 달여 된 우한 봉쇄령을 오는 4월8일 해제할 계획이지만, 단계적으로 공장 가동을 이미 재개하고 있다. 봉쇄령 하에서도 일부 공장을 가동하는 것은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로 보인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미국 체제 보다는 중국 체제가 유리한 점이다. AFP연합뉴스

줄리안 거위츠 하버드대 교수는 3월4일자 옥스퍼드 아카데믹 논문에서 중국의 에이즈 경험은 과거 역사가 아닌, 코로나19가 확산되는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구의 중국 비난은 아편전쟁 이후의 굴욕과 모멸을 상기시킴으로써, 방어적 민족주의를 자극한다. 코로나19 국면에 드러난 것은 방어적 민족주의에서 공세적 민족주의로의 태세 전환이다. 글로벌 팬데믹과 같은 대사건은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에 각각 다른 함의를 던진다. 선거를 앞둔 국내정치에선 트럼프의 지지율 상승에서 보듯 ‘현직 프리미엄’이 커지지만, 대외정치에선 패권국보다 도전국이 입지를 넓히는 경우가 많다.

중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은 데 이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꾸준하게 포인트를 쌓아왔다. 양차 세계대전 뒤 헤게모니 국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대체된 것이 좋은 본보기다. 다만 미국은 지난 세기 영국이 갖지 못했던 달러화 발권국의 특수지위를 갖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중국이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을 제안한 건 달러화 패권을 겨냥한 담대한 포석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중국은 보다 큰 판을 짜고 있다.

트럼프의 자유무역협정과 파리기후협약 파기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미국이 떠난 공간에 어김없이 파고든다. 국제규범의 공백이 중국의 공세적 접근을 열어주었다.(이희옥 성균관대 교수) 커트 캠벨 미국 아시아그룹 대표와 러시 도시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전략이니셔티브국장은 18일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중국이 코로나19 방역장비를 대량으로 제공하고, 국제협력을 주선하는 등 글로벌 리더의 역할을 이미 해내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세계 질서는 처음엔 조금씩 바뀌지만 어느 순간 한꺼번에 뒤집힌다. 캠벨과 도시는 영국이 헤게모니를 상실한 1956년 수에즈 운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제2의 ‘수에즈 순간(Suez moment)’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 백악관에서 코로나19 특별대책팀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우한의 의사들이 새로운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경고한 뒤 WHO 보고까지 최소 5주 동안 사태를 키웠다는 비난은 적어도 중국 지도부에는 부차적인 요소다. 세계의 중국 책임론에 개의치 않는 게 중국식 사고다. 왕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되레 “중국은 이미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중국의 노력은 각국의 방역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팬데믹 대책 마련에 리더 역할을 할 능력이 안되거나, 할 용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만으로도 중국 리더십을 부각할 수 있다. 그 빈틈을 물량으로 채운다. 중국은 유럽연합(EU)이 외면 또는 방치하고 있는 이탈리아에 마스크 200만개, 호흡기 10만개, 구호복 2만벌, 진단키트 5만개 등을 공수했다. 이란과 세르비아는 물론 아프리카 54개국에도 긴급 방역장비를 투하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은 방역장비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N95 마스크의 절반 정도는 중국이 만들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소비한다. 중국은 공여국, 미국은 수혜국이 된 셈이다.

중국인은 미국인과 다른 방식으로 전략적 사고를 한다. 단극 체제가 아닌 다극 체제를 선호한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각각 다른 가치를 표방하는 다극화로의 첫걸음을 뗄 것인가. 링 부소장은 중국의 중·미 간 ‘신냉전’의 도래를 우려했다. 이근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트럼프가 할지 (미국 대선 뒤) 바이든이 할지 모르지만, 미국은 자유와 혁신을 강조하는 미국 모델로 맞설 것”이라며 “미·중 간 모델 경쟁이 미래산업의 가치사슬 재구조화로 연결될 것인지가 가장 궁금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모든 정황과 증거는 중국이 이미 미국이 갖고 있는 ‘구정’의 무게를 묻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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