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접경에 찾아온 평온, 나쁘지 않은 '시그널'
작년 7월부터 남북의 확성기 방송 탓에 시끄러웠던 접경지역에 고요가 돌아왔다. 이재명 정부 출범 1주일 만에 벌어진 변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서신 교환을 재개하려는 정황도 드러났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안에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은 12일 브리핑에서 "(북한 소음 방송이) 어제 밤늦은 시간에 정지됐고 오늘 새벽이나 아침에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로써 작년 5월부터 깨진 접경지역의 평화가 돌아왔다. 그러나 남북 간 확성기 전쟁 중단이 '분계선의 평화'로 이어질 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이 실장은 접경지 부근에서 우리 군이 계획했던 포사격 훈련 시행 여부에 대한 언론 질문에는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합참은 전날 오후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을 일제히 중단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 지난 9일, 통일부가 최근 잇달아 대북 전단을 살포한 민간단체에 "한반도 긴장을 조성하고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라면서 살포 중지를 강력히 요청한 데 이은 유화 제스처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6.15공동선언 기념사에서 "안타깝게도 지난 3년간 남북 관계는 단절됐고, 냉전 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접경지역의 긴장이 고조됐다"면서 "(남북 간) 소모적인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을 재개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대통령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우상호 정무수석이 대신 읽은 기념사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사라진 평화를 복원해 가자"라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싸울 필요 없는 평화"를 강조한 지난 4일 취임사의 약속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달하는 국방비와 세계 5위 군사력, 또 한미 군사동맹에 기반한 강력한 억지력으로 북핵과 군사도발에 대비하되 북한과의 소통 창구를 열고 대화 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남북 간 소모적인 싸움은 작년 봄 탈북자 단체의 대북 전단 풍선 부양→북한의 오물 풍선 부양→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7.21.)→북한의 소음 방송로 악화됐다. 합참은 당시 "북한의 내부 동요나 탈북, 북한군의 기강이 흔들리는 등 다양한 효과와 함께 이에 따른 '2차 효과(탈영 등)'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이 소음 방송으로 응수하면서 접경지역 주민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남이 먼저 손을 내밀자, 확성기 방송으로 얽힌 실타래를 푸는 데는 하루로 충분했다. 그러나 남북 간 소통 창구를 마련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 5일 조선중앙통신 '국제소식' 란에 "한국에서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대통령이 탄핵된 후 두 달 만인 6월 3일 대통령 선거가 진행됐다. 더불어민주당 후보 리재명이 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두 문장의 단신을 전한 것 외에 남측의 정권교체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 출범 뒤에도 아무런 메시지도 내지 않고 있다. 미국이 내민 손도 뿌리치고 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11일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편지 수령을 거부했다는 보도와 관련한 질문에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서신 교환에 여전히 열려 있다. 첫 임기 때 싱가포르에서 이뤄진 진전을 보길 원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북한 전문 NK뉴스에 따르면 뉴욕 주재 북한 외교관들이 트럼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려던 편지의 수령을 거부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북한이 남측은 물론 미국과도 당분간 담을 쌓고 지내겠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북한은 2023년 12월 31일 당중앙위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한 뒤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도로의 북쪽 구간을 폭파하고 대남 방책을 쌓고 있다. 작년 12월 말 제11차 전원회의에서는 미국에 대해 "반공을 변함없는 국시로 삼고 있는 가장 반동적인 국가적 실체"라고 규정하며 "국익과 안전보장을 위해 최강경 대미 대응 전략을 강력히 실시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결의한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핵무력 고도화 및 국방력 강화 △대남, 대미 정책의 원칙적 전환 △당 중심의 통치체제 강화 △사회주의 건설의 전면적 발전 등 핵심 목표 달성에 주력하고 있다. 내년 초로 예상되는 조선노동당 제9차 당대회 전까지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이유다.
이재명 정부 역시 이러한 흐름을 읽고 있기에 상황 관리 태세를 취하고 있다.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지 않되, 성급하게 남북 대화를 재개하려는 의도는 내보이지 않고 있다. 화해 메시지만 발신할 뿐이다.

"북한이 전화를 받지 않고 문을 잠그면 외부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다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준비해야 한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 미들버리 국제관계연구소 교수가 섣불리 문을 열려는 시도를 경계하며 한 말이다. 그는 다만 "언제든 대화에 나올 것이기에 우리가 대화할 준비가 돼 있음을 북한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아는 북한은 "대화가 필요하면 돌연 노크하거나, 문을 밀거나, 슬쩍 문에 부딪혀 시그널을 주는 데 능란하다"고도 했다.
이종석 국정원장 후보자도 지난해 시민언론 민들레 인터뷰에서 "민주 정부는 무엇보다 김정은이 말한 '가장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협력을 통해 서로 이익이 되는 지점을 찾아가겠다고 공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을 통해 잇달아 내보낸 메시지와 같은 맥락이다. 대화와 항구적인 평화는 장기적인 과제. 일단 '접경의 평화'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