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외교안보 관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gino's 2025. 6. 5. 01:04

제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4월, 한반도 안팎은 어수선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험이 스멀스멀 대기를 채우고 있었다.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에 놓인 일본도 전전긍긍했을 터. 

아베 신조 총리는 중의원에서 한반도 유사시 계획을 보고하면서 "(난민) 상륙 절차와 수용시설 설치와 운영에 관해 일본 정부가 보호할 사람에 해당하는지 스크리닝하는 등의 대응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크리닝(심사)'라는 단어에 눈이 멈췄다. 대한민국 국민을 졸지에 가상 난민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북미가 끝 간 데 없이 호전적인 말을 주고받던 시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국민이 초췌한 모습으로 일본 해안의 심사대에 선 장면이 그려졌다. 외교부의 입장을 물었다. 놀랍게도 "어떠한 입장(PG)도 정리한 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PG는커녕 일본에 최소한의 불쾌감 전달도 없었다.

PG는 여러 언론의 쏟아지는 질문에 일일이 대응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는 동시에 잘못된 답변으로 인한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준비하는 모범답안이다. 묻는 언론이 적었거나, 많았더라도 외교부는 침묵을 지키겠다는 '작심'에 다름 아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경제부총리 최상목이 3일정부서울청사에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와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사진을 찍고 있다. 외교, 안보, 통상을 아울러 국정을 잠시 책임졌던 그는 집에 돌아갔다.  2025.1.3.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제21대 대선을 앞둔 2025년 봄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임 주한미군사령관이 잇달아 '선'을 넘었다. 제이비어 브런슨 사령관은 4월 10일(한국 시각 11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주한미군의 임무가 기왕의 대북 억제와 함께 "동해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서해에서 중국의 위협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3일 자 디펜스뉴스 인터뷰에선 6·3 대선 이후 한미일 협력의 미래와 관련, "새 대통령이 6월 4일부터 '일종의 동맹(한미일 협력)'이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다시 외교부에 PG를 요청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는 일이 없다는 한국 입장이 담긴 '한미 전략적유연성 합의'에 어긋나는 잇단 발언이었다. 일개 주둔군 사령관이 대한민국 지도자를 거론한 외교적 무례 역시 따질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PG는 없었다. 개인적 의견만 돌아왔다.

취재 결과 외교부 리더십은 브런슨 사령관이 쏟아낸 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침묵했다. 브런슨은 15일에도 하와이 심포지엄에서 "한반도는 중국 앞에 있는 고정된 항공모함"이라면서 또다시 전략적유연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과연 이런 외교부가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공교롭게 두 번 모두 대통령이 쫓겨난 뒤 치러지는 대선 기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권력 공백기'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평소 하던 대로의 연장이라고 본다. 문제는 몇 주 지나면 새 정부가 들어설 텐데 굳이 표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보신주의, 복지부동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국가가 풍운의 위기에 빠질 수 있고, 국민이 집단모독을 당할 수 있는 기간이다. 단순한 직무유기를 넘어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꼴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사령관이 20일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주한미군 사령관, 한미연합사 사령관, 유엔사 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2024.12.20. AP 연합뉴스

12.3 내란으로 국민이 새삼 그 심각성을 깨달은 사안의 하나가 관료의 문제다. 내란 수괴와 군 수뇌부가 벌인 불법계엄 뒤 한껏 '대통령 행세'를 하더니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간 경제·통상 관료. 민주화 이후 오랜 병폐로 지목된 검찰 및 사법공무원들의 행태가 국민의 뇌리에 돋을새김 됐다. 그러나 외교안보 관료들은 기실, 비판의 사각지대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침묵으로 일관한 건 국방부도 마찬가지다.

브런슨의 잇단 돌출 발언에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한미 간에 협의할 사안"이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입장조차 없었다. 입을 다문 건 외교, 안보 관료뿐이 아니다. 브런슨의 관련 발언이 처음 나온 4월 11일부터 5월 22일까지 외교부와 국방부 정례브리핑을 전부 뒤져보았지만, 관련 질문을 던진 언론은 없었다. 전략적유연성이나,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은 국방 사안이되 외교부가 협상한다. 언론조차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4월 17일 국방부 언론 브리핑에서 그나마 최근 안보 상황에 관한 질문이 두 개 나왔다. 한반도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구(One Theater)'로 통합하자는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의 제안과 주한미군이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의 중동 순환 배치에 이어 에이태큼스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한 것과 관련한 질문들. 대변인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우선 '하나의 전구' 제안에 대한 우리 국방부의 입장 질문에 "일본 측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게 없다"라면서 "미일 국방 당국자 또는 장관, 방위상들께서 해당하신(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국방부가 언급할 내용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이 빠진 자리에서 한반도가 포함된 전구(戰區) 통합이 거론된 사실에 대한 어떠한 문제의식도 보이지 않았다. 주한미군 전력 이동에 관한 군의 입장 질문에도 "특별히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사안이 없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6월 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서 연설을 마치고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2019. 6. 30. 연합뉴스

"대통령 부재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도 못 하는 것은 우리 국력에 대단히 마이너스 요소라고 보지 않는가"라는 질타성 질문에 내놓은 답이라는 게 "늘 말씀드리지만, 한미 연합 방위 태세를 토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미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라는 것. 질문에 다소 어폐가 있었다. 아무런 조치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방부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공무원을 두고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비아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권력공백기라도 자기 입장이 없는 외교부, 어떤 질문이 들어가도 한미동맹을 운운하며 얼버무리는 국방부가 과연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기는 참 어렵다. 브런슨이 한국을 과연 주권국가로 여기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주권국' 개념은 대한민국 외교안보 관료들조차 별로 없어보이기 때문에.

언론과 국민을 상대로 '비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외교부, 국방부와 달리 브런슨은 대단히 적극적이다. 상원 청문회에선 동맹에 대한 '외과수술식 외교(surgical diplomacy)'를 강조하면서 "한반도에서는 현재 외교가 (진행되고) 있다. 파트너들과 눈을 마주 보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주한미군 전력(패트리엇 포대) 이동에 관한 지시를 받고, 동맹에 설명하면서 '전략적 명확성'을 유지한다고도 했다. 과연 그가 우리 관료들을 상대로 어떤 외교를 벌이고 있는지, 또 벌여나갈지 걱정이 앞선다.